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3세 (문단 편집) === 가톨릭 동맹(신성동맹)과 제6차 위그노 전쟁(1576~1577) === <볼리유 칙령>은 위그노, 즉 칼뱅파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한 것이어서 이에 반대하는 가톨릭 과격파인 기즈 공 앙리가 '''가톨릭 동맹'''을 결성했기에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. 기즈 가는 오랫동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청했고, 기즈 공 앙리와 그의 친족들은 가톨릭 동맹에 충성을 맹세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. 또한 가톨릭 동맹은 도시 중산층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. [[앙리 4세|나바르의 앙리]]가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, 사치에만 몰두하는 '''앙리 3세 드 발루아-앙굴렘''', 가톨릭 동맹의 수장이자 [[카롤루스 왕조]]의 후예라 주장하며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'''앙리 드 기즈'''[* 여담으로 기즈 가문의 본가는 로렌(로트링겐) 가문이었는데 훗날 [[신성 로마 제국]]의 황제 [[카를 6세]]가 [[프란츠 1세|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옌]]을 자신의 사위로 맞이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로렌 가문이 [[샤를마뉴]]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.], 발루아-앙굴렘 왕가와 먼 친척 관계이자 앙리 3세의 매부였던 나바르 왕 '''[[앙리 4세|앙리 드 부르봉]]''' 등이 서로 혈전을 벌인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.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에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, 12월엔 푸아티에와 기엔에서 위그노들이 무장봉기했다. 기즈파가 스페인 [[압스부르고 왕조]]로부터 확고한 지원을 얻은 한편으로 위그노들도 남서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. 그들은 또 국외의 신교도 국가의 지원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와 독일 신교 제후국들이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하는데 지나지 않았다. 이번 전쟁에선 왕제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(전 알랑송 공 프랑수아)와 당비르 등의 폴리티크파가 가톨릭 동맹에 참가하여 전황은 위그노에게 불리했다. 결국 앙리 3세와 위그노는 <볼리유 칙령>에서 얻은 양보 대부분을 철회하고, 가톨릭 측은 동맹을 해체하는 '''베르주라크 평화조약'''(1577)을 체결하여 6일 후엔 이를 확인하는 '''<푸아티에 칙령>'''이 발효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